농민전쟁이 발생하게된 배경을 봉건적인 조세수탈구조와 봉건관료들의 비법적인 수탈, 그리고 개항이후에 전개된 일본상인등 외국상인들의 경제적인 침탈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농민들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이 요구한 것은 봉건적 조세 수탈과 봉건관료
농민전쟁은 봉건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봉건사회 내부에서 새롭게 성장한 신흥 상공업 세력과 기존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몰락 양반의 연합에 의해 추진된 반봉건 투쟁이었다. 토대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따른 봉건제의 위기 상황 속에서 농촌사회의 계급 관계가 재편되고, 지주제가 강화되면서
동학과 농민전쟁의 결합설‘에 초점을 맞추어 동학과 농민전쟁과의 관련성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신용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의 결합」,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 일조각, 1993, 2~3쪽
또한, 갑오농민전쟁의 역사적 역할과 성격을 명확히 하기위한 농민전쟁의 주체세력을 밝히는 것도 중요
동학농민군세력에 결집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이와같이, 정치기강의 문란과 사회적 불안은 한편 민중의 동요를 가져와, 그것은 결과적으로 화적의 횡행과 민란의 재연으로 나타났는데, 삼남일대에서 가장 심하였고 나아가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연결되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도 침략의 위협이 다가오
운동(洋務運動) 및 일본의 문명개화사상(文明開化思想), 그 중에서 특히 후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는 고종의 개명화 에 노력하며서 여러가지 개혁사업을 벌이는데, 그것이 결국 개화파 주도 및 방식에 의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으 로, 기존 집권층의 반발을 받았다.
더구나 개혁정책에
세력관계 속에서 외국(청)의 무력개입에 의해 패배하면서부터 민씨정권의 대외의존성은 더욱 심해졌다. 정치적으로는 청이 우세한 가운데 경제적 침략을 둘러싼 청· 일의 각축전 또한 치열하였다. 특히 일본은 청이 임오군란 이후 '수륙무역장정' 을 통해 얻은 특권 - 한성에서의 개시 및 내지에서의
세력에 의해 새로운 평가를 받기 시작했어며 최근 농민을 주체로 하는 反封建, 反侵略의 민족운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동학농민혁명으로 재평가 받게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면 1, 2, 3 차 교조신원운동을 바탕으로 고부봉기를 일으켜 전주입성에 이르는 동학농민군
운동 과정을 통해 서로 결합되면서 동학조직 내에서 이른바 남접이라 일컬어지는 사회변혁의 주체세력을 형성해갔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제 1차 농민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어갔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전쟁의 시작
사회변혁의 주체세력 중 동학농민전쟁의 주역인 전봉준 등은 이미 삼례집회
Ⅰ. 갑신 정변
1. 개화파와 갑신정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중국의 양명학, 훈고고증학 등 한학의 도입과 성리학에 대한 비판의식이 대두되어 성리학은 조선 전통사회를 이끌어온 지배이념으로서의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경제적 피폐와 관료의 극심한 횡포에 따른 민생고 문제에 대한 반
일들을 보면서 19세기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학농민전쟁과 태평천국운동은 그 민중적 질곡의 속박을 자각을 통해 해방을 이루어내는 모습에서 오늘의 산적한 문제를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할 것이라 생각된다. 이 장에선 한중일 3개국의 현대사를 비교 중 홍수전과 전봉준을 비교 연구하고자 한다.